40년 넘게 영화를 만들어 온 정지영 감독의 신작 '내 이름은'이 제주 4·3사건이라는 민감한 소재 때문에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었던 제작 과정을 공개했다. 이 영화는 18세 소년과 그의 어머니가 과거의 아픔을 마주하며 4·3사건의 비극을 간접적으로 조명한다.
1983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한 이래 40년 이상 한국 영화계를 지켜온 정지영 감독이 4월 15일 개봉하는 신작 '내 이름은'에 대한 깊은 소회를 밝혔다. 정 감독은 "이번 영화는 고생을 많이 했다"고 운을 떼며, 특히 민감한 사회적 소재로 인해 투자 확보에 상당한 난항을 겪었음을 토로했다. '내 이름은'은 '영옥'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싶어 하는 18세 소년과 그의 어머니 '정순'의 이야기를 축으로, 과거의 상처와 제주 4·3사건의 아픔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 크라우드 펀딩으로 완성된 '내 이름은'
'내 이름은'은 제주 4·3 평화재단 공모전에서 당선된 각본을 바탕으로 제작이 추진되었으나, 영화계의 높은 벽과 소재의 민감성으로 인해 상당 기간 투자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정 감독은 영화 제작 초기부터 크라우드 펀딩을 통한 제작비 모금을 결정했다. 함세웅 신부, 백낙청 교수, 조정래 작가, 현기영 작가 등 각계 원로들로 구성된 제작추진위원회를 꾸려 대중의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영화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지만, 정 감독은 "돈이 모자랐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제작비가 더 충분했더라면 더욱 감동적인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내비쳤다.
▲ 4·3사건의 복합적 의미와 영화적 재해석
정 감독은 '내 이름은'의 각본을 여러 차례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름 찾기라는 기본 아이디어와 인물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제주 4·3사건이라는 묵직한 역사를 작품에 녹여내는 작업을 심도 있게 진행했다. 다만, 영화는 4·3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1998년, 4·3사건이 공론화되기 시작한 시점을 배경으로 아들과 어머니의 서사를 통해 사건의 아픔을 우회적으로 그려낸다. 특히 아들 영옥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루며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을 보여주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정 감독은 과거의 폭력이 단순히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세습되고 집단 폭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주고자 이러한 구성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등장인물을 단순히 피해자로만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폭력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그려지는 입체적인 인물 설정을 통해 4·3사건 당시 복잡했던 역사적 맥락을 담아내려 했다. 정 감독은 "피해자지만 가해자 역할을 한 사람도 있고, 한 동네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함께 사는 경우도 있었다"며,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중첩된 죄의식을 영화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접근은 당시 국가폭력의 희생자였던 민간인들에게 총을 겨눠야 했던 사람들의 복잡한 심경과 상황을 암시한다.
▲ 염혜란 배우에 대한 극찬과 차기작 구상
'내 이름은'은 정지영 감독의 영화 중 드물게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정순 역을 맡은 배우 염혜란은 정 감독이 전작 '소년들'(2023)에서 이미 눈여겨봤던 배우로, 염혜란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밝혔다. 정 감독은 염혜란 배우에 대해 "자기 역할이 무엇인지 잡아내서 간단하면서도 쉽고 절절하게 표현해버렸다"며, "한 시대를 주름잡을 천부적인 연기자"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어 "정순은 한국 현대사에서 아픈 역사, 큰 폭력의 역사를 거친 인물인데, 염혜란 씨가 잘 소화해줬다"고 덧붙였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최고령 감독 중 한 명인 정 감독은 자신을 '거목'이 아닌 '중목'으로 칭하며 겸손함을 보였다. 끊임없이 작품을 만드는 원동력에 대해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좋다"고 답했다. 하지만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자신이 만들고 싶은 소재를 관객들이 계속 좋아해 줄지에 대한 의문을 표하며, 앞으로 작품 활동에 대한 조심스러운 예측을 내놓기도 했다. 현재 그는 차기작을 준비 중이지만, 다음 작품 이후의 계획까지는 세우지 않고 현재에 집중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